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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기도

  • KIMMSN
  • 2023년 8월 2일
  • 24분 분량

교회를 처음 나온 사람이 언제 기도를 배우게 되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저는 소위 모태 신앙이기 때문에 기도를 언제 시작했는지의 기억 조차 없지요

누가 기도를 가르쳐 주었는지도 기억이 없어요

분명 부모님이시겠죠

그리고 자라나면서 교회에서 선생님이 하시는 것을 들으면 습득했겠죠

아주 어렸을 적에 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기위해 경연 대회도 했던것이 기억 납니다

머리가 나쁜 탓인지 사람 앞에서의 공포인지는 몰라도 중간에 포기하고 들어 왔죠

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이요

모임이 끝났다는 신호용으로 주기도문을 사용하지 않나요?

특히 주일 대 예배에는 대표 기도하시는 장로님의 기도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보다 훨씬 더 멋지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기독교의 초짜가 아니면 아마 길을 가다가 드라큘라를 만난 사람들일 겁니다


<기도는 왜 필요한가?>

기도란 모든 종교에서 자신들이 믿는 신과 교감하는 방법이지요

큰 나무에게 절하며 비는 일방통행의 교감이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의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주고 받는 인격적인 교감입니다

가끔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듣던 말든 상관하지 않고 일방통행으로 혼자 원하는것만 부르짓는 사람도 있긴 하지요

그래도 그런 기도는 상담학적인 면에서 보면 아주 좋아요

왜냐하면 스스로 힐링이 되잖아요

마음 속 한을 쏱아 내고 풀어 버리는 스트레스 해소보다 더 좋은 힐링이 없으니까요

한바탕 신나게 기도하고 나면 시원하지 않나요?

기도는 자신 속에 감추인 욕망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무도 듣지 않으니까요

단체로 통성기도 하라고 하면 좀 어색하잖아요

남들이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주여~쭈시 옵쏘서”만 되풀이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남에게 말 못하는 마음 속 생각을 기도를 통하여 털어 내어 버리면 정신 건강학적인 면에서 볼때 상담사 앞에서 맘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잖아요

특히 방언 기도를 하고 나면 기도하는 자신도 이해 못하는 마음 속 깊은 문제까지도 하나님께 보고 드리고 해결받는 느낌이 들어서 시원함 내지는 성취감, 영적 우월감 까지 갖게 되죠

이러한 우리의 한심한 기도 때문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로마서 8:26-27).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시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거지요

우리는 자신의 욕심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기도를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은 예수님께서 모두 필터로 걸러내 버리시죠

나의 명예를 걸고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예를 걸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철없는 기도를 하지만 안심하고 기도 할 수 있지요

우리의 육체의 소욕은 항상 성령님을 거슬리게 하는것을 주님이 아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만을 믿고 일생동안 기도로 나의 육체의 소욕과 싸우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거죠

날마다 기도로 우리의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6-26).

육체의 정과 욕심이란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 행위, 집착이죠

그러한 집착이 내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이방인처럼 그것들을 평생토록 요구하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주님은 우리의 수준을 아시니까요


<기도의 시작>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직접 소통을 했지요

눈 감고 하나님께 기도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과 대화로 소통 했지요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세요

아담이 하나님과 대화할때 눈감고 두 손 뫃으며 기도하는식으로 대화하지 않았을꺼잖아요

단순히 아담과 하나님이 서로 대화를 했겠지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말씀으로 하셨잖아요

선악과를 먹은 후에도 “누가 너희의 벗었음을 고했느냐?” 도 말씀하셨고

아담과 이브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말을 했지요

그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눈 감고하는 기도라는 표현이 필요가 없었겠지요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대화로 소통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가 끊기고 난 후 서로의 대화의 소통이 되지 않으면 사람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게 되죠

그렇게 되면 대화가 아닌 기도라는 표현이 도입되기 시작하지요

항아리 속에 있는 마왕을 불러내기 위해서 항아리를 손으로 문질러야 하잖아요

항아리를 손으로 문질러서 항아리 속에 든 마왕을 부를때

그 문지르는 행위가 바로 기도인거죠

만일 마왕이 항아리 속에 있지 않고 항상 내 곁에 함께 있다면 항아리를 문지르는 기도의 형식이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인거죠

기도는 말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르는 마음, 생각 그리고 행동까지 모두 기도에 속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인 거죠

우리의 삶 자체가 찬앙이며 예배인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는 천지창조의 첫 사람인 아담에서부터 출발한거지요

<기도가 필요한 이유>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죠

그런 기도는 다른 모든 종교에서 그리고 산 신령에게도 하는 기도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약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온다는 약속(언약)을 합니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약속(언약) 이죠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하늘에서 번개와 함께 땅으로 내려 오시는 방법이 아니라

여자가 임신을 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방법이죠

이와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위해 사람을 통해서 즉, 사람이 언약에 동참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방법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소통을 해야 하죠

사람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고 하나님과의 소통 안에 있어야 하는거죠

물론 언약과 관계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 필요가 없겠지요


신약 성경의 사도행전을 보시면 사도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창세기에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인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고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되셨잖아요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 되어 나가는 출발이 사도행전에서 묘사되고 있지요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복음을 등에 지고 세상을 향해 뛰어 가는 모습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사도를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복음을 땅 끝까지 보내시는 모습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의 주체자가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이 복음 전파의 주체란 뜻입니다

전도자와 선교사는 목수 손에 있는 망치나 톱의 역할을 할 뿐이죠

언약을 간단히 설명하면

언약은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께서 서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고 그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택하신 자녀들에게 은혜로 , 선물로 공짜로 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이 사실을 복음이라고 하잖아요

이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을 통해 점진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예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언약 책인 성경 말씀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예언을 한다면 그 예언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관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무당이 점을 치고 예언하는 그 예언과 같은 것이죠

무당들이 쓰는 단어들이 성경 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아서 헷갈이시면 않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아브라함을 통해 계시하시면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하고

모세를 통해 계시하면 모세 언약, 다윗을 통해 계시하시면 다윗 언약이라고 하지요

언약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이 언약의 주인공이시며 주체자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등의 사람들을 통해서 언약의 하나님과 그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부분적으로 설명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이 주체자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시해 나가는 거지요

그러면 사람이 없으면 복음이 전파 되지 못하고 실패 할까요?

그렇지 않죠

시편 19편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말씀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도 세계 끝까지 이릅니다

다만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 할 수 있는 영광의 특권을 주시는 거죠

내가 주체가 되어 좋은 직장까지 버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가는 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체가 되시고 나는 성령님 손에 잡힌 도구로 사용되는 것뿐이죠

자랑할 것이 없다니까요

수술하는 의사의 손에 들려있는 칼, 메스가 수술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수술을 하는거잖아요

칼은 자랑할것이 없어요

만일 내가 땅 끝까지 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드려 순중한다면

그 주님의 명령이 나에게 율법의 명령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 선교를 떠나게 되지요

명령이기 때문에 명령을 순종함으로 조금이라도 떳떳하고 바른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하다면 그것이 율법의 행위로 인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의미가 되는거죠 바리세인처럼 말이죠

그러면 선교사로 가면 안되나요?

선교를 아무나 갈 수 있는거 아니잖아요

선교지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자신의 삶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갈 수 밖에 없죠

그런 사람에게 “당신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군요”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의 대답은 “저는 율법을 순종하려고 이 일을 하는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사랑해서 하는 겁니다” 라고 말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순종하기 위한 율법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교지로 보내기 위해서

그 선교지 사람과 눈이 맞아 결혼해서 가도록 할 수도 있고, 그 곳에 가면 돈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갔다가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선교사의 일을 하게 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도 율법을 순종하기 위해 결혼한 것도 아니고 돈 벌러 간 것도 아니지요

선교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이 그 일에 사람을 동참 시키시죠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레서 주님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한 눈에 반하게 하시고, 이사 가게 하시고, 이민도 가게 하시 잖아요

그러나 선교사가 되었을 때 나에게 돌아 오는 존경이나 대우 혹은 이익을 생각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여김을 받기 위해 선교사가 되었다면 그 자체가 율법의 행위예요

어디든지 자신를 위해 선교사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면 그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불법의 행위죠

단지 선교사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거니까요

바리세인들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자신이 정당하며 의롭고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거 잖아요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거니까요

그런데 죄는 깨닫지 않고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바리세인이라는 증거 아닌가요?

그런 마음을 가지면 큰일나요 빨리 회개 하셔야 해요

왜냐하면 내가 율법을 지켰으니 의로운 사람에 속하고, 의로운 사람이니까 나의 기도는 응답 되어야 되고, 그로 인해 복을 받아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세인같이 되는거니까요

일단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면 십자가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 바리세인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면 감사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무서운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혹시라도 십계명을 읽으면서 “주님 저는 이런 죄를 안 짓고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란 기도 해 보셨나요?

그런 생각이 들면 큰 일 나요.

그럴 때는 빨리 회개 하셔야 해요

죄를 깨닫게 해 달라고기도 해야 해요

십계명은 구약의 율법을 간추린 엑기스잖아요

십계명은 우리가 못지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인데 “이건 내가 지켰다”라는 생각이 들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십계명의 어느 계명을 읽더라도 어떤 것도 내가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어서 그에 대한 회개의 기도가 절로 나와야 해요

이렇게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니까요

<기도는 본능>

기도를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피조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절대자 신을 찾도록 만들어졌지요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피조물인 인간은 바위나 큰 나무 밑에서라도 절을 하며 신을 찾고 기도를 했잖아요

모든 종교에서 기도를 해요

종교가 없는 사람도 기도를 하죠

종교가 있든 없든 목숨이 위태울 때에는 모두가 살기 위해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를 하잖아요 가장 확실하며 명확한 기도의 내용이죠

그러나 기독교인의 기도는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는 기도입니다

언약에 관계된 기도가 아니면 큰 나무나 돌에게 비는 기도와 다를바 없죠

가끔 교회에서 기도를 시키면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셨나요?

왜 기도를 못한다고 말할까요?

“살려 주세요”라고 간단히 말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면 쉽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긴박성이 없는 상황에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들처럼 멋진 기도를 할 수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것 아닌가요?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자녀가 교통사고 나서 수술 중이라면 왜 기도가 안나오겠습니까?

“ 살려 주세요 제발” 하고 기도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기도는 안 배워도 충분히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기도는 살기 위해서만 하는 기도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는 기도이어야 하기 때문에 언약에 대해서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는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언약과 관계없는 기도는 큰 바위에게 비는 기도와 다를바 없지요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만들어진 이스라엘 조차 그 언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호세아서에서 말씀하시 잖아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언약의 혜택을 입는것을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아는것이 영생인 거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언약에 동참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 때문에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 또한 하나님의 언약 성취와 그 결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들어 주시는 거죠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언약의 내용 안에서의 관계성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언약의 주인공 안에서의 관계성이죠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과 기도를 통해 마음을 교감하실 필요가 없지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라는 도시를 기억하시죠? (창19장)

그 도시를 멸망 시키는 중에 그 도시 안에 살고 있는 롯이란 사람이 구출을 받게 됩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죠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해 내시는 이유는 29절에서

"하나님이 들의 성읍들을 엎으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해 내신 거죠

아브라함이 산기도 들어 가서 철야 금식해서 얻어 낸 응답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셨던 거죠

이심전심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죠?

이러한 하나님과의 이심전심의 마음은 신약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바리세인중에 사울이란 청년이 있었지요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전 사울이란 이름었죠

그 청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예수 믿는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음에 넘기도록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섬겼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왜 나를 괴롭히냐고 말씀하셨지요 (사도행전 9장)

그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을 괴롭힌 사람은 한 둘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사울이란 청년에게 나타나셨죠 왜냐하면 그를 언약 안에서 중요한 일을 시키시려고 하셨기 때문이죠

사울이란 청년은 예수님을 만나 사도 바울이 되었잖아요

그리고 성령님은 그를 도구로 사용하여 복음을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군대 감옥에 넣고 그 곳에서부터 복음이 땅끝까지 퍼져 나가는 기점을 삼으셨지요

예수님은 언약 안에서 성도들과 이심전심이 되어서 성도가 핍박 당할때 주님도 그 아픔을 함께 공유 하십니다

언약적 표현으로는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가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성도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심으로 남자인 예수님과 아내인 성도들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됨으로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창세기의 언약을 이루신거지요

세상에서 핍박 당하는 성도의 고통을 주님께서도 같은 고통을 느끼시기 때문에

성도의 아픈 마음은 주님과 교감이 되는 기도 그 자체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힘들고 절실한 상황에 있는 그 느낌을 아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교감을 하시고 있기에 자초지종을 말로 주님께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고통받는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 앞에서의 부르짓음의 기도가 되니까요

성도의 부르짓음은 요한 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6:9,10)


부르짓는 우리의 기도와 마음을 아시지만 주님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응답하지 않습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롯을 구하듯 급하게 서두르실 때도 있지요

그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교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급하게 구해 내시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주님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스데반 집사를 하늘에서 서서 지켜 보셨던 것 처럼요

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감당하기 위해 태어난 배우들이기 때문에 그 배역이 끝나도록 감독은 유심히 지켜보고 계시는 거죠

(배역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설명 드리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유는 언약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이 언약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죠


<언약 기도 vs 비언약 기도>

기도에는 두가지 종류의 기도가 있습니다

성경의 언약에 관계된 기도와 언약과 관계없는 기도가 있지요

성경의 언약에 관한 기도를 언약 안에서의 기도 (언약 기도)라고 하고

언약과 관계없는 기도를 언약 밖의 기도 즉, 비언약 기도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단어는 제가 임으로 사용하는 단어임으로 이 글에서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성경 안에서의 기도가 왜 언약 기도인가 하면

성경이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새언약과 옛언약, 신약과 구약이라는 언약책이 잖아요

구약은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약속이고

신약은 언약의 주인공이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려 주시고 그 혜택을 창세전부터 택한 자들에게 은혜로 거져 주시는 내용이죠

그 언약의 수혜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소통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인 그들의 삶 자체가 기도라는 영역에 속하는 거지요


<비 언약에 속한 기도>

성경의 내용인 언약과 관계없는 기도는 당연히 비언약에 속한 기도가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시니까 그런거 구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죠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약의 총 책임자이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니 걱정 할 필요 없다는 뜻이지요

이방인들은 언약과 관계없는 사람이기에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 하겠죠

누가 그 기도를 들어 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를 보면 아들 낳게, 공부 잘하게, 돈 잘 벌게, 건강하게, 좋은 직장 갖게, 훌륭한 사람 되게 해주세요 등등 자신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을 비 언약 기도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큰 나무 밑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기도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다음날 누군가 그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옯겨 버리고 없다면 어제 그 나무에게 기도했던 사람은 어떻게 하죠?

그야 간단하죠 다른 나무를 찾아서 그 밑에서 또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기도 하면 되죠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나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만든 신에게 절한 거죠 단지 그 나무를 통해서 했을 뿐이죠

신에게 기도하는데 그냥 허공을 보기 보다는 나무라도 쳐다보면 집중 되니까요

나무 입장에서는 하나님으로 이용을 당했을 뿐이예요

이런 기도가 비 언약의 기도이죠

이런식으로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식교를 가든 장로교를 가든 아무 관계가 없죠

아무 교회나 가서 기도하고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복을 받기 위해 교회와 그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이용 했던 것뿐이죠

그런 사람들의 특색은 성경의 언약 같은건 무관심하죠

이렇게 성경의 언약이라는것을 모르는 사람의 기도는 당연히 자신의 마음 속으로 생각한 하나님이란 분을 이용해 자신의 필요한것을 얻는것이 목적인 거죠

큰 나무를 이용해서 기도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무관하다란 의미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는 삶을 살며

사람을 만든 목적에 맞지 않는 삶을 사는 거죠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뭔지 조차 관심도 없는 거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언약 때문이거든요

우리가 태어난 목적, 사는 목적, 기도하는 목적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주님이 이루신 언약에 대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 태어 났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 존귀과 영광을 드리기 위해 태어난 거죠

만유의 주되신 주님 안에서 소통하면서 사는거죠

그런 삶이 기도하는 삶이죠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이리 저리 이사 다니거나 이민 가서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를 가든 이웃들에게 우리 속에 가득찬 십자가의 은혜의 향기를 뿜어 내게 됩니다

주님은 모든 성도를 그렇게 세상 끝까지 향기를 내 뿜도록 보내시는 거죠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내시기에 우리의 삶을 언약 안에서의 삶을 산다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 비언약적인 삶은 그와는 반대 되는 삶을 살겠지요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목표이겠죠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마음처럼요

성경의 언약에 무관심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 외에 다른 기도를 하지 못하지요

그런 삶이 비언약적인 삶이며 그런 사람이 하는 기도를 비언약 기도라고 해요

비언약적인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있을 곳이 없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 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죠

그런데 이 언약이 땅끝까지 전시 되여야 하는 하나님의 취지와는 반대로 흩어지지 말고 우리끼리 뭉쳐 살자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거지요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결국 그들은 땅 끝까지 흩어져 살게 만드셨지요

언약의 사람들은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땅 끝까지 전시하는 삶을 살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땅 끝까지 가도록 만드시는 거지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언약의 주인공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전시하고 싶어하죠

물론 그들은 바벨탑을 하늘 끝에 닿게해서 노아의 홍수가 다시 일어나도 살아 남겠다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 의지도 담겼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바벨탑을 쌓는 이유와 목적과 그들의 행위를 비 언약적인 기도의 행위이며 삶인 거죠

주기도문에서 말씀하는 일용할 양식 보다는 10년 내지는 평생 자식에게 물려 줄 양식을 위해 몸부림치는 오늘날의 사람들의 기도와 삶이 바벨탑을 쌓는 마음 아닐까요?

혹시 바벨탑 교회라고 들어 보셨나요?

그 교회 목사님들은 자신의 바벨탑 교회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 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종종 보여 주시잖아요

나의 개인의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 생각 그 자체가 언약과 무관한 비 언약에 속한 기도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나”를 위하지 않고 “우리”를 위한 기도인 거죠

“나”만을 지칭하면 비언약에 속한 사람이 되고

“우리”는 라고하면 언약 안에 있는 성도이며, 주님의 신부이며, 주님과 한 몸된 지체인 거죠


<언약 안에서의 기도>

언약에 관계된 기도를 의미하지요

언약이란 단어가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언약이란 의미를 외우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서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을 언약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것이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택한자에게 연약 성취의 혜택을 은혜로, 공짜로 주심으로 인해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영원히 한 몸, 한 성전, 신랑 신부가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언약과 언약의 성취를 알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 하셨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천지창조를 통해 설명하시면 창조 언약이라고 하고

노아를 통해서 언약이 스팟 라이트처럼 조명되어 보여줄때 우리는 노아의 언약, 무지개 언약이라고 하지요

또 아브라함을 통해서 설명되면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등등 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부분적 점점 명확히 설명 하시는 거죠

언약의 내용, 복음의 내용 안에 있는 기도가 성경적인 기도이며 언약 안에서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기도의 내용이 언약이 성취 되기 전과 언약의 주인공이 오신 후의 기도의 내용으로 나뉘지겠지요

언약이 성취되기 전은 십자가 사건 전을 말하며

후는 언약의 주인공이 오신 후를 말합니다


<언약이 성취 되기 전 기도>

언약이 성취 되기 전의 기도 내용은 다음 세가지에 관계 된 기도입니다

언약의 하나님, 오실 언약의 주인공, 언약 성취와 그 영향

구약의 모든 기도의 핵심은 이 세가지에 관계됩니다

예들 들어 봅시다

다윗 왕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달아나 숨어 있을때

오늘 밤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로 이 도시로 쳐 들어 온다는 정보가 들어 왔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 했죠

오늘 사울이 잡으러 오는데 제가 여길 떠나야합니까? 라고 묻죠

하나님은 움림과 둠밈으로 응답하셨지요

제사장의 옷인 에봇의 가슴판에 달리 움림과 둠밈이란 제비뽑는 주머니가 있었지요

다윗이 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제비를 뽑음으로 하나님의 대답을 알게 됩니다

아직도 이 땅에 성전이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제사장 역을 맡는 교회 목사님의 주머니에 흰돌, 검은돌 두 개를 넣고 하나님의 뜻이면 흰돌, 뜻이 아니면 검은 돌을 꺼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정말 기가막히지 않겠어요?

성전이 없어졌으니 제사장이 필요 없고 에봇도 없어졌으니 하나님의 뜻이 답답한 교인들은 금식 이나 산기도를 가야 하잖아요

오늘날의 교회가 구약의 성전 시스템을 본따 사용하면서 왜 제사장의 에봇은 사용하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다윗이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도

언약의 관점으로 봐야 해요

우림과 둠밈만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예수님의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 출연한 배역이지요

다윗 언약이라는 배역 속에서 예수님의 왕되심, 제사장 되심, 선지자 되심의 역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다윗이 에봇이라는 제사장 옷을 이용한 것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영원한 우리의 제사장이며 (히브리서) 그의 응답은 언약의 주인공인 영원하신 제사장인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시건 자체가 장차 오실 언약의 주인공을 설명하기 위하 영화 세트, 무대 장치와 같은 거였지요


<언약이 성취 되기 전 기도의 예 #1- 갈멜산에서의 기도>

언약이 성취 되기 전 즉, 에수님 오시기 전의 기도 예를 두 가지만 들어 볼께요

첫번째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한 기도입니다 (구약 열왕기상 18장)

엘리야의 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의 기도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듣지 못하는 내용이지요

엘리야는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의 선지자들 850명과 결판을 내고 있었지요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 제물을 올려 놓고 기도를 할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오게 하는 신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신의 선지자들 850명은 힘을 합쳐 통성으로 부르짓는 기도를 했지만

응답이 없었죠

그들은 자신의 몸을 칼로 자해하면서까지 몸부림치며 부르짖었지만 아무 응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제단의 제물 위에 물을 아주 많이 부어서 제물은 물론 제단 도랑에 물이 가득하게 만들었지요 왜냐하면 사람이 고의로 불을 짚힐 수 없도록 말이죠

그런 다음 엘리야의 이 간단한 기도가 마치자 마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응답하셔서 물로 가득찬 제단 위의 제물은 물론 제단 도랑의 물까지 완전히 태워 버렸지요

엘리야가 나무 뿌리 뽑는 몸부림 치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응답 하 신 이유는

그의 기도 내용이 언약을 잊어 버린 백성에게 언약의 하나님을 알려 주는 언약의 기도이기 때문이죠

구약에서의 모든 기도는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의 주인공과 언약의 성취에 촛점을 맞추는 기도입니다

<언약이 성취 되기 전의 기도의 예 #2 -성전을 향한 기도>

구약 성경 열왕기상 8장에는 솔로몬 왕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 기도의 내용 중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와 간구를 들어 달라는 내용이 있지요

오늘날에도 이 솔로몬의 기도를 배워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향하여 기도를 하면 응답이 될까요?

글쎄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세우리라고 하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가버리셨으니

주님이 세우신 성전은 하늘에 있지 이 땅 위에는 없잖아요

예수님이 오신 후 즉, 언약이 성취 된 후에는 이 땅의 성전을 다 헐라고 하셨기에

교회가 성전이 아닌 이상 교회를 향해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 한것 아닌가요?

만일 교회가 성전이면 목사님은 제사장이 되시고 목사님 옷 가슴 주머니에 움림과 둠밈이 있을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는데 헷갈림이 없죠

흰돌과 검정 돌로 YES냐 NO를 분명히 알 수 있을거니 까요

언약이 성취 되기 전의 구약의 성전은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예표이며 모형이며 그림자였기 때문에 성전을 향해 기도를 한다는 의미는

언약의 성취자를 바라보는 언약의 기도인거죠

구약에서 성전을 바라보면 드리는 기도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 되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고 하신 그 말씀이 바로 성전을 향해 하는 기도의 성취인 거죠

솔로몬의 기도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내용이 언약의 주인공에게 촛점이 맞추어 집니다

신 구약 성경 전부가 언약과 언약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임으로

성경을 묵상하거나 큐티의 촛점은 언약과 언약의 주인공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오늘도 무사히 승리하는 하루가 되는 좋은 구절을 찾는다면 기독교가 아니라 무당교를 믿는거지요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해가 안되시면 “아! 이 내용은 내가 아직 이해 못하고 있는 예수님의 언약에 관련된 어떤 것이구나”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궁금하시면 책을 사서 읽으셔도 되구요

만일 예수님의 언약과 관련 짓지 못하는 책의 내용이면 그 책은 반품하시면 되는거죠

설교든 성경 공부든 구약의 내용을 예수님과 언약에 관련 짓지 못하면 들을 필요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는 거죠

이스라엘 역사도 예수님의 언약과 관련을 짓지 못하면 무의미한 내용인거죠

요한복음 5장 39절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요

구약 하박국 3장에서 이런 구절을 기억하시나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은 가난해도 억수로 일이 잘 안 풀려도 감사하란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는 언약으로 인한 기쁨을 이야기하는 거죠

물론 성경의 언약을 모르시면 언약 성취의 기쁨을 이해 못하지요

이 하박국의 내용은 언약의 주인공을 내다 보며 기뻐하는 거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은혜로 인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쳐남으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성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찬양이며 기도의 내용인 거죠

이런 성도의 마음을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에서는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 라는 한마디의 기도안에 다 포함 됩니다


<언약의 주인공이 오심과 그 후의 기도 예 - 불의한 제판관, 겟세마네 기도, 주기도문>

언약의 주인공이 오셔서 언약을 성취하고 난 후에도 기도의 내용은 언약을 떠나서는 안되요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설명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만드신 일종의 영화 촬영장이며 연극 무대같은 겁니다

관찰용 개미집 같다고 할까요?

성경의 모든 사건 사고가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의 주인공에 관한 것을 설명하고 전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관찰용 개미 어항 같이 이 우주를 만드셨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시작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땅이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을때 빛이 창조 되어 비추는 모습은 마치

지구라는 연극이 시작과 동시에 무대 위의 커튼이 올라 가면서 조명이 비추는 그런 모습 같아요

연극의 마지막 장면으로 계시록이 끝이 나면서 “주여 어서 오소서” 가 울려 퍼지면서 이 세상 역사의 연극 무대의 막이 내려 오는 거지요

혹시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유리 어항 속에 흙과 개미를 넣고 개미들이 집을 어떻게 짓는지를 관찰해 보신적이 있나요?

어항 속의 개미들이 집을 짓도록 한 이유가 뭐죠?

개미들의 행복과 안정된 삶을 위해서인 가요?

아니죠 개미 관찰 어항을 준비한 주인의 계획을 위한거죠

개미가 사는 어항이 사람에게는 무한한 우주이고

주인의 계획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획하신 언약인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되겠지요

천지창조가 바로 이 언약을 실행할 장소가 만들어진 거예요

우주가 창조된 목적은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지 우리의 행복한 삶이 목적이 아니죠

그런데 어항 속의 개미들은 항상 어항 밖을 쳐다보며 어항을 만든 주인에게 ‘이것이 부족하다’, ‘저것이 부족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내 문제를 해결하라’고 부르짖죠 기도라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항 속의 개미들은 주인의 목적에 따라 개미 집만 열심히 만들어 보여 드리면 되는거 아닌가요?

그것을 위해 태어난 거니까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사람은 언약을 위해 태어 났잖아요

이 세상 만물이 다 언약이란 관찰용으로 창조 되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인한 그 엄청난 구원의 혜택을 우리들의 삶 속에 멋지게 전시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어항 속에서 전시하면 되는 거죠

비유하자면, 하나님은 언약을 설명하시기 위해 천지창조와 십자가라는 한편의 언약 영화를 만드셨지요

영화의 세트장으로 우주와 지구라는 세트가 마련 된거죠 연극 무대 장치처럼요

그 안에서 우리들은 주님하신 언약의 성취와 그 혜택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온 동네에 자랑하고 전시하는 배역을 맡고 태어 났지요

어떤 사람은 가난한 배역으로, 어떤 사람은 부자 배역으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로, 교사로, 복음 전하는 자로, 주부로, 직장인으로, 학생으로 각종 배역이 성령님께서 은사로 나누어 주셨지요

배역을 맡은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감독님께서 주시기에 배우들은 걱정 없이 맡은 역할만 충실하면 되는 거죠

우리의 기도는 이런 배역 주세요 저런 배역 주세요가 아니라

무슨 배역을 주시든 감사히 충성을 할 수 있도록 감독님과 교감하는 기도만 하면 되요

영화 대본을 미리 외우고 사는것이 아니기에 항상 무시로 감독님께 기도하면서 살면 되지요

이런 삶을 베드로전서 4:11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라고 표현하시 잖아요

그 배역을 잘 감당하면 무슨 상급이 있는지 궁금하시죠?

만약 천국 가서 누구는 금면류관, 은면류과, 동면류관인데 어떤 사람은 지푸라기 면류관을 영원히 쓰고 다닌다면

시간이 갈 수록 천국도 점점 계급주의로 빈부의 차가 심한 면류관 자본주의가 될꺼구 또 그걸 반대하는 사회주의가 등장하면 어쩌지요?

누구는 천국 맨션에서 살고 다른 사람은 천국 초가집, 흙 집에서 살고...

이런 천국의 모습이 상상이 잘 안 되네요

주님이 주신 배역을 잘 감당하면 상급은 커요 아주 크지요

상급 중에 가장 큰 상급은 내가 하나님의 그 영광스런 언약의 역사 속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이죠

하나님께서 감독하시는 ‘언약’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는 그 영광!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인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의 해택까지도 받게 되죠

그 뿐 아니죠 하늘의 유업까지 물려 받는 은혜를 받는거죠

그런 엄청난 상급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세상에서 자신이 행한 결과의 상급은 상급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계시록에 나오는 장로들처럼 모든 상급의 면류관을 벗어 주님 앞에 드리게 되죠

그러니 결국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소유한 상급은 모두 주님 앞에 드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똑같아요 언약의 성취로 인해 은혜로 거져 받은 구원이 다른 어떤것과 비교 될 수 없기 때문이죠

(제 생각엔, 자신이 이 땅에서 살때 뭔가를 행해서 받은 상급을 천국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 됩니다)

은혜로 거져 받은 구원보다 금이나 다이어몬드 면류관이 더 가치 있을까요?

그런 오해를 할까봐 천국의 길거리는 황금으로 아스팔트를 깔았다고 하잖아요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들이 주님의 은혜로 거져 얻는 구원에 비해 얼마나 가치가 없는 것임을 설명하는 거죠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람에게 가장 큰 상급이지요

아브라함에게도 내가 너의 방패이며 상급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잖아요


영화 속에 잠간 나왔다가 말없이 사라지는 엑스트라를 생각해 보세요

4시간 짜리 영화에 5초 동안 얼굴이 나왔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요

수 천년되는 지구의 역사 속에서 수 천 억되는 인구 중에서 100년도 못 되는 잠시 나왔다가 사라지는 우리의 엑스트라 같은 인생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영화 속의 우리는 아침 안개처럼 잠시 있다 사라지지만 각자 독특한 배역을 맡고 엑스트라로 참가하는 영광을 얻으거죠

먼 배경에서 한 순간 나타났다 없어지는 엑스트라가 감독에게 날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면서 이것 저것 달라고 요구할 수 없잖아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 할 수 없지요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엑스트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신다니까요

영화의 엑스트라는 감독님이 원하시는지시만 따르고 죽어라 할때 죽고 뛰어라 할때 뛰면 되는거 아닌가요?

언약이란 영화 속에 태어나게 하신 은혜만으로도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기도를 할 뿐이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배역을 잘 감당하기 위한 기도만 필요한거예요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하려면 영화 촬영장에서 나가야 하죠

연극 무대에서 내려 오시든지, 지구를 떠나시든지…

그러나 하나님께 언약이라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에수님을 위해 태어나 참예할 수 있는 은혜를 얼마나 큰지를 안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쉬지않고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감사과 찬양의 기도가 입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배역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맡은 배역은 내 속에 사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배역입니다

내가 기도한다고 해도 기도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나’라는 존제는 예수님 안에 숨겨진 배역이기에 내가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드러나는 배역을 잘 감당 하셔야 해요

내 이름이 드러나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묘비명에는 자신의 이름 대신 “주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 라고 쓰여 있어야 하죠 이름없는 묘비의 주인이 성도들인 거죠

내가 기도하는 줄 알았는데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기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산 나의 인생인줄 알았는데 내 속에 주님이 사시는 거였죠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에서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할 내용은 무엇이겠어요?

내 안에 있는 나를 확인하는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힘써 확인 또 확인 하는것 아니겠어요?

사나 죽어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죠(빌립보서 1:20).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도움어디서 올꼬” 이런 기도를 하면 내가 주체자가 되잖아요

(물론 구약의 이 기도 의미는 언약의 하나님을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체자가 되려면

눈을 들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밝히 보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면 되잖아요(갈3: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되죠?

율법 아래 저주의 종 노릇하는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되겠지요

또 예수님과 함께 죽어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자신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겠지요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 되는 거죠

그런데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언약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배역을 맡은 사람들이 영화 감독과 주인공인 예수님과 서로 교감이 안되는거예요

이것을 보고 호세아 선지자가 이 백성들이 무지하므로 망한다고 말했지요

자신이 출연하고 있는 언약이란 영화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까 그런거지요

우리가 언약의 수혜자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 보세요

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관심과 연구하는 열린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아는것이 영생이고 구원이고 천국입니다

영생은 얻고 싶은데 언약과 언약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거죠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천국 가는거 아니라니까요

기도는 눈 감고 하나님께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언약과 언약의 주인공을 아는 지식과

언약 안에서의 모든 행위, 삶 자체, 배역 자체가 자신의 몸으로 하는 기도인 거죠

<#1 과부의 부르짓는 기도>

약속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언약의 성취는 시작 되었지요

그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밤낮 부르짓는 어느 과부의 이야기이죠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구절의 의미를 사기 당했을때 기도로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신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되죠

많은 사람들이 낙망치 않고 부르짖으면 기도가 응답된다고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부르짖음이 경비원을 부르는 빨간 단추가 아니죠

사람들이 통성으로 함께 부르짖는다고 하나님이 달려 온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상 부르짖었던 구약 사사기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도록 주변 나라가 침략하도록 놔두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자기 소견대로 맘대로 살다가 괴로와서 못견디면 하나님께

부르짖죠 그러면 사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하시는 분이 언약의 하나님이란 것을 알게 하시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안이 찾아 오면 또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 버리고 우상을 섬기죠

하나님은 언약을 잊어 버린 사람을 부르짓도록 만드시고 그 부르짓음에 응답하셔서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는 겁니다

아무나 부르짖는다고 응답하시는건 아니지요

하나님은 언약을 알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시니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짖도록 만드시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항상 기억했더라면 이스라엘이 그렇게 힘든 인생을 살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강조할 때 구약 성경 예레미아 33:3의 구절을 많이 인용하잖아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으면 사기꾼 이 어디 사는지 알려 주신다는 뜻이 아니지요

하나님께 부르짓을때 비밀한 것을 보이는 그 비밀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구약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촛점을 맞추는 기도인거죠

예수님께서 하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에서 나오는 택하신자란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안에서 아들로 택함을 얻은 언약의 수혜자 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잖아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아버지께 기도하면서 낙담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아버지가 기다리게 하시면 믿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요 낙담하지 마시고 아버지를 믿으세요

불의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직업이 재판관이기에 들어 줄 수 밖에 없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택한 아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건 당연한거 아닌가요?

택하신 자들의 기도가 언약에 관계되는 아벨의 원한과 같은 언약의 기도라는 것이 이 비유의 촛점입니다

우리가 할 기도가 바로 그런 언약의 기도라는 뜻이지요

피를 흘린 아벨의 원한, 순교자들의 원한의 기도 말입니다

이것을 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 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요한계시록 6:9-11)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아벨의 원한과 같은 언약에 관한 원한의 내용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나의 육적인 욕망인지 다시 한번 점검할 때입니다

언약과 관계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육의 부르짖음일 뿐이니까요


< #2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마태복음 26:39절에 기록된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기도를 아시죠?

언약의 주인공이 언약의 성취에 대해 언약을 함께 계획하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이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언약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 기도를 들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으신데 차마 그럴 순 없고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요 라는 식으로 기도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과 이 십자가를 목표로 서로 약속하시고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언약의 성취는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로 알려 주시는 거죠

창세전에 계획하신 언약을 재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인거죠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 역시 형식은 기도이지만 우리에게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성도인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형식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 역시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갈 수 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약 안에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언약의 주인공의 이름으로 기도는 것이죠


<#3- 주기도문>

에덴 동산에서부터 언약하신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기다리던 언약의 주인공과 함께 있는거죠

언약의 주인공과 함께 있는 성도의 기도는 창세전부터 언약을 계획하신 언약의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하겠지요

언약의 성취로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남에게 베푸고 전달하며 전시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거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는 요구에 관한것이 아니라 연약에 관한 기도이지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의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리심을 받은 언약의 성취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란 의미죠

그 뜻은 일용할 양식이 이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인 말씀이지요

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도 이 땅에서 덤으로 산다는 고백이 되는 거죠

마치 아브라함의 마음이 본향에 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 땅에 미련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 평생먹고 살 것을 달라고 기도할꺼예요

언약을 모르니까 일용할 양식인 말씀을 달라고도 않할꺼잖아요

이 세상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이 땅에 정을 붙히고 사는 사람들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마음에 의미 있게 와 닿질 않을 껄요

그러니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교회에서도 즐겨 사용하지 않잖아요


위의 세가지 기도 모두가 언약 안에서의 기도임을 우리는 알 수 있지요

신 구약 어디서나 성도들의 기도는 항상 언약에 관한 기도 외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언약을 위해서 창조된 세상이고 우리도 언약을 위해 창조 된 사람들이니까요

언약과 관계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영원한 쓰래기 통에서 고각 처리 되지요

우리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말이죠

<누구에게 기도를 해야 하나요 - 하나님 ? 예수님?>

제가 어렸을때 주일학교에서 배운바로는 하나님께 기도 하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 그 기도는 천사가 하늘로 배달을 해준다고 배웠죠

기도 마지막의 예수님의 이름은 마치 편지에 붙히는 우표 딱지 같은거고요…

조금 나이가 많아지면 우표에서 도장으로 바꿔서 가르치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도장을 찍는 거라구요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렇게 말하죠

‘먼저 시작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내용은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마지막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내라’

주일학교에서는 언약에 대해서는 들은 정보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하나님과 예수님 중에 누가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죠?

요한복음 14:14를 보시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기도를 해야합니까?

예수님이죠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죠

그러니 이제부터는 기도 하실때에 “하나님” 하지 마시고 “주님~~” 하고 시작하면 되는거죠

하나님께 직접 가고 싶으신가요?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뛰어 넘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요한복음 14:6절에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방법도 만날 방법도 없고 기도를 드릴 방법도 없지요

구약시대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를 드렸지만

언약이 성취 된 후에는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직접 기도하는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만 상대 하시니까요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가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죠

그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십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은 볼 수가 없지만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볼 수 있지요

예수님은 우리 모양의 본체이시고 우리는 그의 짝퉁으로 지어 졌으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시려면 예수님을 사랑하셔야 해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핍팍하게 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만 촛점을 맞추면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 비슷한 미안한 마음이 생기나 봅니다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경배와 찬양은 주님께 드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더 이상 햇갈리실 필요 없어요

로마서 11:36을 보시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영광이 예수님에게 영원히 있으리로다 !아멘! 인거예요

구약에서는 모든 영광을 언약의 하나님께 돌렸지요

그 이유는 아직 약속된 연약의 주인공인 만유의 주이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니까요

그 언약을 성취하신 주인공이신 메시야에게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3을 보시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사는 이 우주와 지구의 천지창조는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고 모든 영광의 광채가 되시기 때문에 “영광이 세세토록 예수님께 있으리로다 아멘” 하게 되는 거지요


모든 감사와 존귀 그리고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돌리시면 됩니다

물론 기도까지 주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면 되는거죠

참고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죠?

우리 안에, 성도 안에 계십니다

성도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 주님이 계시리라 약속하셨죠

우리 성도의 만남과 대화 그 자체가 기도의 만남인 거죠

실감이 안나고, 안 믿어지지면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만나셔도 되구요

예수님과 대화하려면 두 손 뫃아 눈 감아야 하나요?

그러다가 망상에 빠질 수도 있지요

기도는 예수님과의 대화 잖아요

예수님은 내 안에 그리고 성도 안에 계세요

예수님과 대화 하고 싶으시면 성도들과 이야기 해 보세요

그만큼 성도를 문안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로마서는 성도의 문안으로 마치고

히브리서 역시 문안하라고 마치죠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

성도의 문안이 기도하는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잖아요

예수님께 대접하고 싶으시면 성도님들을 대접하세요

주님이 많이 기뻐하실 겁니다 성도를 괴롭히면 주님께서 왜 나를 괴롭히냐고 하실꺼구요

예수님을 대면하거나 만나고 싶지 않고 단지 내 종교적 만족을 채우고 싶으시다면

종교 의식을 써비스로 해주는 단체로 가서 멋진 종교 의식을 경험하세요

그러면 바리세인들이 즐기던 그 영적인 성취감 내지는 기쁨은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

교회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 대중 앞에서 멋진 기도를 하시는 것을 많이 보셨지요?

성도들 모두가 그런 멋진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죠

기도는 성도들과 대화하는 그 연속성 위에서 주님과 하는 대화 입니다

만일 주위에 성도가 없는 무인도에서 기도한다면 내 안에 계신 주님과 독백처럼 대화를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내 주위에 성도를 있게 해 주셨다면

그 성도들을 통해서 주님이 대화를 하고 싶으신 거예요

물론 분위기상 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혼자 기도를 해야 할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이며 예외적인 특별한 경우지요

매일 산에 가야 한다면 혼자 자연인으로 살면 되지요

그러면 주님과 둘만의 삶을 즐길 수 있지요

성경적으로 언약 안에서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는

나만을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다른 지체 즉, 다른 성도들을 위한 목적이 있어요

나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거든요

이를 위해서 주님은 나를 다른 성도들 속에 보내셨고 또 다른 성도를 나에게 보내시는 거죠

그러므로 인해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 한 성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니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결과입니다

그렇게 한 몸이 된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기도와 찬양이 바로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고백하는 것이죠

이 기도와 고백은 영원히 천국에서도 계속 되어야 할 기도이죠

영원한 천국에서는 ‘기도’라는 단어 보다는 ‘경배와 찬양’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겠네요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가 주님을 직접 보지 못할때 하는 거죠

그러나 천국에서는 주님을 직접 보기 때문에 기도보다는 경배와 찬양이 더 아름다운 기도의 표현이 되겠군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나님께서 직접 대화 하셨던 것처럼요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수님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언약을 세우시고

때가 되어 그 언약을 성취하셨지요

그 ‘십자가 언약’의 수혜자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언약하신대로

예수님과 아내인 성도들이 한 몸, 한 육체가 되었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아내인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유의 주(빌2)이심을 고백 함으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지요

이 기도를 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내 입을 도구로 사용해서 기도하시는 것이지요

공짜로 얻은 십자가 언약의 완성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감사와 존귀 그리고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내용 뿐입니다


“영광이 세세토록 예수님께 있으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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